블로그 주인 소개: 박재한
이 세상엔 대단한 분들이 많아서, 나서는 것이 부담스럽고 조용히 사는 것을 미덕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으나, 접점을 늘리면 예상치 못한 인연과 기회가 생기는 것을 보고 블로그를 통하여 제 사소한 경험들이라도 앞으로 꾸준히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https://www.linkedin.com/in/jaymepark/
저는 야놀자, 페이코(NHN), 토스, 카카오뱅크, 에이블리, Pala에서 아래의 일들을 해왔습니다.
(전략) 신사업/서비스에 대한 전략을 개발하고 방향성을 설계하고, 필요한 경우 Corp-dev 등 실무도 진행했습니다.
(제품) 사업과 서비스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품화하여 개발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Action item 개발과 스펙의 구체적 설계를 하고, 스크럼을 운영하고, A/B Testing 및 지표 개선을 통한 점진적 개선을 했습니다.
(비즈니스) Business projection부터 서비스의 개발 이후 구체적인 Go-to-market 전략의 개발과 실행을 주도했습니다.
(운영) 비즈니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세일즈 조직 및 운영팀을 주도하였고, 20명+의 팀을 리딩했습니다.
(채용) 20명 이상의 채용을 진행하였으며, 300명+ 이상의 인터뷰에 참여했습니다.
(아래부터는 너무 TMI여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읽지 않으시는걸 추천드립니다)
2007년, 싸이월드 방문자 추적 서비스를 개발했었습니다. 브라우저의 Cookie에 남은 ID값을 읽어 서버에 저장해 내 미니홈피에 누가 방문했는지 알려주는 서비스였습니다. 당시 사용자당 월 9,900원을 받았는데, 리텐션이 거의 100%에 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Analytics tool 같은 것이지만, 취약점을 이용했기에 당시 싸이월드에서는 경찰 수사 등 엄포를 놓았고, 저는 당시 중학생이었기에 덜컥 겁이나 서비스를 접었습니다.
이때 온라인 결제를 받는 절차가 매우 불편함을 깨달았고,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소규모 서비스(웹 머드게임, 웹하드 등)들을 대상으로 PG를 쉽게 연동할 수 있는 서비스인 'iCash'라는 서비스를 만들어 월중개액 13억 이상까지 달성했었습니다. (지금의 아임포트 같은 서비스입니다) 이니시스에서 3%에 받아다가 10%에 재판매를 했습니다. (물론 무단 재판매였습니다) 그러다 한 카드사에 발각되면서 강력한 항의가 접수되었고, 너무 어렸기에 뭔가 사업화를 해본다는 발상까지도 못하고 무서워서 후다닥 접어버렸습니다.
당시엔 고등학생이었는데, 쉬는 시간에 노트북으로 개발하고 고객 응대를 하는 등 사업의 재미를 느끼다가 갑자기 접게되니, 큰 무기력에 휩싸여 게임에 중독되었습니다. 공부에 손을 놓았고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는데, 당시 에브리타임 같은 앱이 없던 시절 학교 익명 커뮤니티 앱을 만들어 재학생 1만명 이상을 모으고 주변 음식점 등에 광고비를 받으며 인터넷 사업에 대해 다시 한번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2학년을 다니다 지방의 인프라에 한계를 느껴 서울의 한 대학교에 편입하게 되었고, 운영하던 앱은 학교에 기증하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편입을 앞두고 은행권 SI 개발 알바를 하다, 2013년 1월 70명 남짓이던 야놀자에 개발자로 취직하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현재까지 인터넷 업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야놀자에서는 1년간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고, hotelup.com 이라는 구인구직 플랫폼의 개발을 맡아 다양한 수익 구조를 팀원분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이때 PG사에 납부하는 수수료가 꽤 높은편임을 보고, 몇개 회사들을 비딩시켜 1% 이상의 결제 수수료 절감을 이끌어냈고, 이후 야놀자 전사의 PG 서비스를 통째로 바꾸는 사업자 재선정 및 연동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이때 이수진 사장님을 비롯한 경영진께서 비즈니스 마인드를 좋게 봐주셔서 신사업팀에 참여할 기회를 주셨고, (주)야놀자트래블 이라는 자회사를 공동 창업하여 '야놀자펜션' 서비스를 5명의 팀원들과 다같이 개발해 런칭했고, 야놀자에 인수되었습니다. 이때 사업/서비스 기획을 하였으며, 당시 Huepension 등 펜션 예약 서비스 회사들의 인수 등을 통해 시야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옐로모바일 및 쿠팡도 인수전에 뛰어들며 떠나요닷컴 등을 인수하는 등 펜션 예약 시장이 과열되었지만, 승리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너무 어렸고 스스로 미숙하게 느껴져, "내가 하는 방식이 맞는걸까?"에 대한 고민이 깊었습니다. 큰 인터넷 기업에서 방법론을 배워보고 싶었고, 이에 당시 네이버와 한게임이 인적분할한 NHN Entertainment로 이직해 간편결제 서비스인 페이코(PAYCO)의 초기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당시 페이코팀은 저 포함 3명이었는데, 저는 당시 회사가 인수했던 한국사이버결제(NHN KCP)의 인수후통합(PMI)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단지 25살짜리 사원이었는데, PG업에서 잔뼈가 굵은 KCP의 베테랑 부장님들과 일할 수 있었고, 기존 빌링시스템과 외부 시스템을 연계하는 작업을 통해 PG/VAN 시스템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당시 팀장님이셨던 오보명 이사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고, 이직한다고 했을 때 스타트업에 갔다가 후회가 되거든 언제든 돌아오라고 말씀해주신 진은숙 CTO님의 따뜻한 말씀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2015년 토스라는 앱을 우연히 알게되었고, 혁신적 사용자 경험에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만해도 보안카드나 OTP 없이 절대 송금할 수 없었는데, 지원 은행이 지방 은행 3개 뿐이었지만 정말 쉽게 송금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결제사업 BDM(Biz-dev Manager)를 채용하고 있었고, 13번째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입사 직후 토스페이(https://pay.toss.im/)의 초기 제품 설계를 했습니다. 전 직장에서의 PG/VAN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자신 있게 설계를 하였고, 이후엔 결제 세일즈를 이어나가다 토스 제품의 Cash burn을 결제 매출로 메꿀 수 없음을 팀이 모두 깨달은 이후 속도 조절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저는 문화상품권 판매 서비스를 시작해보며 플랫폼 사업에 대한 시도를 했습니다. 웹뷰로 띄워서 구매가 들어오면 제가 문화상품권을 컬쳐랜드 사이트에서 사다가 수기로 문자발송 해주는 식이었는데, 정가에 팔았음에도 토스에서 유일하게 매출을 내는 서비스였습니다. 이때 플랫폼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여 기부 기능등을 비롯한 다양한 중개 상품에 대해 시도하였고, 은행 세일즈 및 상품 중개 또한 병행했습니다.
스타트업의 다양한 방법론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웠고, 정말 많은 시중은행 및 금융사와 협업해 사업을 설계하며 모바일 금융 경험 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 감사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토스 창업자인 승건님과 붙어 일하면서 어떻게든 해내는 마인드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 담아보았습니다.
토스에서 은행들과 상품을 설계하며 조급함을 느꼈습니다. 무료 송금 서비스로 토스의 펌뱅킹 수수료는 활활 타고있는데, 은행과의 상품 개발 논의는 거의 1년 이상 걸리고는 했습니다.
그 시기쯤 신규 인터넷전문은행의 인가가 있었고, 카카오와 우연히 인연이 닿게 되었습니다. 은행들에게 상품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다가, 직접 상품을 만드는 경험, 더군다나 은행을 새롭게 만드는 경험은 살면서 아무나 경험하기는 어려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카카오뱅크에 이직 후 4년을 다녔습니다. 감사하게도 예비인가 이후 본인가, 시장 안착 과정까지 PM, 전략, 제휴, Corp-dev, 여신 상품설계 실무까지 전행 영역을 커버하며 은행이라는게 어떻게 새롭게 생겨나는가에 대해 진귀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 담아보았습니다.
그렇게 회사는 성공적으로 상장하고 저도 제 소임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사주도 매각할 겸 퇴사를 했고,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고 싶어 정통 이커머스에 몸담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쿠팡에 Principal Product Owner로 입사 논의 도중, 지인을 통해 지그재그라는 여성 의류 플랫폼을 소개받게 되었고, 그 경쟁사인 에이블리로 이직하게 되었습니다. (응..?)
버티컬 커머스 시장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다가, 성장성과 가능성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지그재그는 당시 이미 시장지배적 사업자였는데, 정보를 좀 검색해보니 기술로 그들과 경쟁하겠다는 에이블리의 언더독 마인드가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에이블리에 PO로 입사 후 2년을 다니며 수익화 개선에 힘썼고 감사하게도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실무형 리더로써 사업의 초기 구상부터 서비스, Go-to-market strategy, 제품 설계, 스크럼 운영, 세일즈 전략 수립과 실행, 사업부 채용, 광고 대행사 선정 등 온라인 사업의 모든 싸이클을 돌아보았고, 이런 종합예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강석훈 대표님에게 감사함을 느낍니다. 당시 한 두번 너무 힘들어 마음이 뜨고 방황을 좀 했었는데, 많이 다잡아주셨어요. 내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 담아보았습니다.
이후 광고사업을 운영모드로 돌려놓고, 새로운 신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사업기회를 살펴보던 중, 우연히 Crypto 업계의 제안을 받게 되어 네이버의 손자회사인 Pala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크립토에 대해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공감도 안되고, 실체가 없고 사짜같았어요. 그런 스스로의 선입견을 한번 깨보고 싶었고, 피부에 와닿는 크립토 서비스가 전세계에 전무후무했기에, 역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DeFi 예치금액 1억달러 돌파, NFT Marketplace 월거래액 100억원 돌파 등 이루기 어려운 성과를 이루고, Pre-money value 300억에서 재직 중 10배 이상까지 돌파했습니다.
업비트 NFT, SKT Topport 등 막강한 경쟁자를 모두 제치고 유일하게 세계 1위 서비스인 Opensea와 Klaytn 기준으로 대등하게 경쟁하는 서비스였으나, 하반기 매크로 환경의 악화로 NFT 가치가 급감하게 되어, 회사는 사업을 신속히 B2B 중심으로 전환해 신세계 푸빌라 등 영업에 성공하여 체질을 개선하려 했고, Track record를 쌓아나갔습니다.
이때쯤 갑자기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생존 확률이 50%가 안되는 가장 나쁜 예후의 암종이었습니다. 1년간의 항암치료, 골수이식, 방사선 치료 등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퇴사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생존했고, 정확히 딱 1년뒤에 다시 재입사했습니다. 더 쉬어도 됐지만, 결자해지 하고 싶었고, 극한의 오너십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복귀한 회사는 처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설립 3년만에 유니콘이 된 세계 1위 NFT Marketplace인 Opensea도 거래량 -99%를 겪으며 구조조정 등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팔라가 국내 1위 서비스였음에도 크립토 특성상 매크로 상황을 이겨내긴 어려워 결국 서비스를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시장의 규모나 앞으로의 유망한 트렌드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사업의 본질과 내재 가치에 대한 소중하고 뼈저린 경험을 했습니다.